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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 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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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미 괴링은 1893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배우로 활동했으며, 1935년 나치 독일의 고위 인사인 헤르만 괴링과 결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아돌프 히틀러를 위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했으며, 전쟁 후 나치 협력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석방 후 자서전을 출간하고 197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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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 괴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5년 괴링
1935년 괴링
본명엠마 요한나 헤니 조네만
출생1893년 3월 24일
출생지함부르크, 독일 제국
사망1973년 6월 8일 (80세)
사망지뮌헨, 바이에른, 서독
안장지뮌헨 발트프리드호프
직업배우
알려진 정보루프트바페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두 번째 부인
배우자카를 쾨스틀린 (1916년 결혼, 1926년 이혼)
헤르만 괴링 (1935년 결혼, 1946년 사별)
자녀에다 괴링

2. 생애

에미 괴링은 1893년 3월 24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배우로 활동했다. 1916년 배우 카를 쾨스틀린과 결혼했으나 1926년에 이혼했다. 1923년 헤르만 괴링을 만나 친분을 쌓았고, 1935년 4월 10일 괴링과 재혼했다. 1938년 6월 2일에는 외동딸 에다 괴링이 태어났다.[8]

나치 독일 시대에 에미는 요제프 괴벨스의 부인 마그다 괴벨스와 함께 독신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했으며, 마그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법원은 에미에게 나치스 판결을 내리고 1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석방 후에는 재산의 30%가 몰수되었고, 5년 동안 배우 활동이 금지되었다.[9][10] 에미는 뮌헨 근교의 작은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1967년 남편과의 삶을 다룬 자서전 《나의 남편 곁에서》를 출간했다. 1973년, 에미는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1893년 3월 24일 함부르크에서 부유한 판매원의 딸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엠마 요한나 헤니 조넨만(Emma Johanna Henny Sonnemann)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 바이마르의 국립 극장에서 배우로 활동했다.[8]

1916년 1월 13일, 조넨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트리에스테에서 배우 카를 쾨슬린(Karl Köstlin)과 결혼하여 에미 쾨슬린(Emmy Köstlin)으로 알려졌다. 괴링은 자서전에서 그녀와 쾨슬린이 친구로서 더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고 곧 헤어졌다고 밝혔으며, 두 사람은 1926년에 이혼했다.[8]

1922년부터 바이마르의 주립 극장 배우로 활동하던 에미는 1932년 바이마르의 한 카페에서 연극단 모임 중 헤르만 괴링을 처음 만났다. 에미는 괴링이 사망한 전처 카린 괴링에 대한 깊은 애정에 감명받았고, 괴링 또한 카린을 신경 써주는 에미에게 호감을 느껴 카린의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으며, 1932년에는 바이마르에서 배우 에미 조넨만이 국회 의장 헤르만 괴링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졌다. 에미는 카린과 마찬가지로 금발 벽안의 북방 인종적인 여성이었다. 에미는 괴링이 카린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카린과 다투지 않았으며, 이 점이 괴링에게 호감을 샀다. 1933년 4월, 괴링이 프로이센 자유주 총리가 되자 그의 압력으로 에미는 독일 최고 명문인 베를린 국립 극장의 배우가 되었다.[8]

2. 2. 헤르만 괴링과의 만남과 결혼

에미는 1893년 3월 24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디즈 국립국장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1916년 배우 카를 쾨스틀린과 결혼했으나, 1923년 헤르만 괴링을 만나 친해지면서 1926년에 이혼했다.[8] 에미는 괴링이 사망한 전처 카린 괴링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에 감명을 받았고, 괴링도 카린을 신경 써주는 에미에게 호감을 느껴 카린의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 1932년에는 바이마르에서 배우 에미 조넨만이 국회 의장 헤르만 괴링과 사귀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에미는 카린과 마찬가지로 금발 벽안의 북방 인종적인 여성이었다. 에미는 괴링이 카린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결코 카린과 다투지 않았다. 1933년 4월 괴링이 프로이센 자유주 총리가 되자 그의 압력으로 에미는 독일 최고 명문인 베를린 국립 극장의 배우가 되었다.

1935년 2월, 괴링의 프로포즈로 두 사람은 약혼했다. 1935년 4월 10일, 괴링과 에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이날은 공휴일이 되었다. 3만 명의 공군 병사들이 도열한 가운데, 괴링과 에미를 태운 오픈카는 주 수상 관저에서 베를린 시내를 지나 총통 관저로 들어갔다. 여기서 에미는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언제든지 고민 상담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어서 베를린 시청에서 민사 결혼을 치르고, 베를린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대성당 상공에는 독일 공군의 전투기 중대가 출격하여 시범 비행을 하고, 황새를 풀어놓았다. AP 통신 특파원은 "마치 카이저(독일 황제)의 결혼식 같다."라고 편지에 썼다. 그 후 호화로운 레스토랑 "카이저호프"에서의 향연에는 필리프 폰 헤센, 아우구스트 폰 프로이센, 괴링의 첫 번째 부인 카린의 의붓형 에릭 폰 로젠 백작 등 친구와 친척 320명이 초대되었다. 함부르크 시 참사원은 에미에게 은괴로 만든 배를 선물했고, 불가리아 왕보리스 3세로부터는 사파이어 반지가 에미에게 증정되었다.[8]

에미와 헤르만 괴링의 결혼식 후 베를린 돔 앞에서 히틀러가 왼쪽에 앉아 있는 모습


결혼 후, 에미는 괴링의 희망에 따라 극장 배우 일을 그만두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오버잘츠베르크의 자택에서 살았다. 1938년 6월 2일에는 외동딸 에다 괴링(Edda Göringde)이 태어났다.[8] 히틀러에게 부인이 없었기 때문에, 에미가 제3제국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녀는 히틀러의 공무 경감에도 공헌했다.

2. 3. 나치 독일의 퍼스트 레이디

나치 독일에서 에미 괴링은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부인 마그다 괴벨스와 함께 독신이었던 아돌프 히틀러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에미는 마그다와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9] 에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여러 국가 행사에서 히틀러의 여주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점과 "제3제국의 퍼스트 레이디"라는 그녀의 주장은 히틀러의 미래 부인인 에바 브라운과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 에미는 에바 브라운을 무시하고 공개적으로 경멸했으며, 이에 분노한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에게 에바를 더 존중하라고 지시했다. 에미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가 히틀러의 바이에른 휴양지 ''베르크호프''에 초대받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5] 에바 브라운은 에미의 "제국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에 대해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6][7]

히틀러에게 부인이 없었기 때문에, 에미는 제3제국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아 히틀러의 공무를 보좌했다. 에미는 불가리아 왕 보리스 3세, 헝가리 왕국 섭정호르티, 그리스 왕게오르기오스 2세, 영국국왕 윈저 공 에드워드, 찰스 린드버그 등을 자신의 저택 "카린할"에 초대하여 맞이했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 독일 패망 후, 독일 법원은 에미에게 나치스 판결을 내리고 1년 징역형을 선고했다.[9][10] 에미는 석방될 때 재산의 30%를 몰수당했고, 5년 동안 배우 활동이 금지되었다.[9][10]

에미는 감옥에서 석방된 지 몇 년 후 뮌헨 근교의 아주 작은 아파트를 구해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1967년에는 남편과의 삶을 다룬 자서전 《나의 남편 곁에서》를 출간했으며, 1973년 사망했다.

2. 5. 말년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독일 법원은 에미에게 나치스라는 판결을 내리고 1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에미는 석방 후 재산의 30%를 몰수당하고 5년 동안 배우 활동이 금지되어 생계를 위협받았다.[9][10]

감옥에서 석방된 지 몇 년 후, 에미는 뮌헨 근교에 있는 아주 작은 아파트를 구해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1967년에는 남편과의 생활을 담은 자서전 《나의 남편 곁에서》를 출간했으며, 1973년 사망했다. 말년에는 좌골 신경통으로 고생했다. 그녀의 자서전은 1972년 영어로 ''My Life with Goering''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에미는 1973년 6월 8일 뮌헨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10] 뮌헨 발트프리트호프에 묻혔다.

3. 출연 영화


  • 빌헬름 텔 (1934)

참조

[1] 웹사이트 Nazi wives: the women beside Hess, Goebbels, Göring and Himmler https://www.historye[...] BBC History Revealed 2020-02-11
[2] 서적 Gun
[3] 서적 Klee
[4] 뉴스 "Lady of the Axis" https://archive.toda[...] Time 1939-07-24
[5] 서적 Gun
[6] 서적 Gun
[7] 간행물 The role of First Lady representing the regime was also bestowed upon [[Magda Goebbels]]. Beside having a close relationship with Hitler and hosting state events, she received letters from all over Germany from women with questions about domestic matters or child custody issues.
[8] 서적 Klee
[9] 간행물
[10]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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